안녕하세요. 토너입니다. 굉장히 오랜만에 드리는 편지인 거 같아요. 정신없이 보내다 2월을 하루 남긴 이제서야 아맞다편지 생각이 나 스티비 창을 열었어요. 다들 2월 한달 야무지게 보내셨나요. 건강하고 무탈하셨나요. 

전 요새 양질의 대화는 무엇인가에 관해 자주 오래 생각합니다. 청자와 화자가 시시때때로 바뀌어 이야기 주인공이 내가 되었다가 다시 네가 되는 랠리, 무슨 이야기를 하든지 귀결이 그 자신이 되지 않는 비-나르시시스트들의 하모니, 오늘 아침 베어 물은 사과 속 벌레를 본 일에서부터 죽으면 어디로 가는가 영혼의 젠트리피케이션까지 헛소리로 삼라만상 훑는 여유, 무엇보다 중요한 건 잠자리에 누워 그날 하루를 복기할 때 대화속 어떤 말도 마음에 걸리지 않는 편안함이겠지요.

저는 한 때 모든 대화의 신이 되고 싶었어요. 너랑 이야기 하면 나도 몰랐던 내 얘기가 튀어나온다는 말을 듣기 좋아했어요. 공부 열심히 해서 정신과 의사가 되어보라는 말도 들었었지요. 생각지도 못한 기가막힌 해결책을 제시하거나 필요할 때 필요한만큼 공감하는 균형감이 있었던 때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잘 모르겠어요. 세상일을 더 많이 겪은 지금, 더 쉽게 흥분하고 더 쉽게 단죄하고, 더 쉽게 내 일이 아니라며 선 긋습니다. 모든 대화의 신은 무슨, 그저 편안한 대화 상대가 되기만 해도 성공이에요.

타인의 삶이 궁금하고 생각을 나누고 싶으면 그만큼 나를 내보여야 합니다. 나를 적당히 포장하기 시작하면 상대도 자신을 적당히 포장합니다. 의미없이 시간을 죽이는 대화의 탈을 쓴 소모가 시작되는거죠. 끔찍하네요. 

얼마전 새로운 친구를 만나 오래 함께 있었어요.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엄청 많은 말을 쏟아냈는데 그날밤 누워 생각해보니 덜컥 걸리는 부분이 딱 두 개 뿐이더라구요. 그 친구가 제 마음을 몰라줄 리 없다는 믿음이 있어 편한 마음으로 깊은 잠에 빠졌습니다. 좋았어요. 

그렇다면 양질의 대화란, 복기했을 때 내가 편한 대화인걸까요. 전 방시혁이 박진영에게 했다는 단 한마디 형, 사람이 논리로 설득돼? 를 유퀴즈 이후 여전히 떠올려요. 박찬욱이 정서경과 하나의 본체, 두 개의 모니터, 두 개의 키보드로 각본 작업 한다는 일도 떠올립니다. 생애 가장 완벽한 대화 상대를 만나려면 나는 어떤 준비를 해야 할까요. 그래요. 내가 나 혼자 똑바로 설 수 있어야겠지요. 내 발 밑이 튼튼해야 튼튼한 땅 위에 선 또다른 사람을 만날 수 있겠지요.

공지영 산문 <너는 다시 외로워질 것이다>를 읽으며 독서의 즐거움을 새로 깨닫는 중이에요. 한 줄 한 줄 읽을 때마다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그가 쌓아온 인생의 위대한 지혜를 공짜로 얻어먹는 기분이거든요. 작가 공지영을 초딩 때 말고 좋아해본 적이 없었어요. 아무리 작가라도 너무 감성적이지 않나? 작가라면 글로만 세상과 소통해야 하는 거 아닌가? 정치적 발언이 매우 잦지 않나? 알고 싶지 않은 이야기가 많다며 외면하던 시간이 길었어요. 이번 책을 읽으며 저는 인간이 얼마나 많은 죄를 짓고 사는지, 다시는 열어보고 싶지 않은 삶의 한 페이지를 기어코 들여다보며 스스로 어루만졌을 때 사람은 왜 강해지는지, 나 이렇게 불완전한 인간이오 내보일 때 나 자신이 얻는 건 무엇인지 감동적으로 배우고 있습니다. 누군가 공들여 만들어놓은 세계를 내 세계와 비교하고 흡수하고 때로는 반박하는 치열한 행위가 독서더라고요. 아주 고요한 동시 아주 시끄러운 싸움. 배움.  

그제 파묘를 한 번 더 보고 왔어요. 평일 낮이었는데 어르신들이 무척 많았습니다. 인상적이었던 건 극장에 자주 와보시지 않았을 것 같은 어르신들 그러니까 시장에서 자주 마주치는, 짭퉁 레스포삭 백팩을 멘 굽은 등의 할머니들이 삼삼오오 손 붙잡고 오셨다는 점이었어요. 자리를 잘 못찾으셔서 핸드폰 후레쉬를 켜고 한참 헤매시길래 좌석을 찾아드렸습니다. 기분이 너무 좋더라구요. 행복했어요. 내가 장재현도 아니고 내가 쇼박스도 아닌데 대체 왜 이 영화의 세대불문 입소문에 흥이 났을까요. 투자라도 했으면 또 몰라.

제 근처에서 관람하시던 분들 뿐 아니라 저 멀리 어르신들께서도 아주 자유로운 관람매너를 갖고 계시더라구요. 스크린 가리건 말건 상체 당당히 세우고 화장실 들락날락 아주 여러번, 네네 문 앞에 두고 가세요 택배기사님과 통화도 아주 크게, 영화상 무서운 것이 나올 땐 극장이 떠나갈 듯 히이익 소리를 내며 놀라시는 모습 등 모든 것이 즐거웠습니다. 상업영화 상영관이라면 자고로 이런 맛이 있어야지 암암 고개를 끄덕거리게 하는 순간들이었어요. 재현아 해냈구나. 장하다 장재현. 아무튼 파묘 아직 보지 않으신 분들은 진짜 제발 봐주세요. 정말 재밌어요. 제가 블로그에 스포 없는 리뷰랑 스포 있는 리뷰, 심지어 2차 관람 후기까지 모두 써놨거든요. 입맛에 맞는 걸로 취사선택 하셔서 읽어주시길 소망합니다. 왜 니 블로그 광고하냐고요? 아 좀 봐줘라~ 열심히 썼다고~ 빨간 글씨 누르면 이동하니까 참고해주세요. 

오랜만에 드리는 편지라서 말이 아주 많았네요. 읽기 지루하지 않으셨길 바라봅니다. 쓰려고 했던 여섯 가지 얘기 중 반만 적었을 뿐인데 너무 길어져서 나머지 세 가지는 다음 편지에 쓸게요. 새학기 시작하는 3월이 진짜 신년이라는 말이 있지요. 작심삼일도 100번만 하면 1년이라는 친구의 명언 공유드리며 소인 이만 물러갑니다. 행복합시다. 건강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