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삽사리와요. 토너입니다.

20대 중반 어느날, 친구와 시답지 않은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 우리는 과연 어떻게 늙어갈까 대화 나눈 적이 있어요. 저는 우아한 늙은이가 되고 싶다 했고 친구는 부자가 되고 싶다 했어요. 내가 우아라는 단어를 뱉을 때 친구는 손담비 니가? 짤 표정을 지었습니다. 그래 알아 나한테 우아는 없지 그냥 씩씩하지 그럼 씩씩하게 늙어야겠다 깔깔 웃어보였지요. 

이제는 생각이 달라졌어요. 우아는 생김새로만 얻을 수 있는 미덕이 아닙니다. 마음가짐으로 획득할 수 있습니다. 우아함은 보드라운 피부, 은은하게 빛나는 진주에서만 오지 않습니다. 쉽게 흥분하지 않는 자세, 범람하는 유혹 위를 뚜벅뚜벅 걷는 초연함, 트렌디와 거리가 멀면서 일관된 취향, 세대를 관통하는 소박함에서 오기도 합니다. 저는 그렇게 믿어요. 

이승만기념관에 큰 돈을 기부해 화제가 되었던 이영애 새 드라마 마에스트라 스틸을 보다가 우아함은 어디에서 오냐는 질문이 떠올랐어요. 타고난 게 없다면 후천적으로 만들면 된다 그렇다 내가 생각하는 우아는 강인함과 침착함이다 강해지자 침착해지자 정신승리적 결론을 내렸습니다. 

영화 싱글인서울을 봤어요. 제가 영화에 기대하는 어떤 것도 발견하지 못한채 2시간이 흘렀습니다. 그러기도 참 드문 일인데 말이죠. 

민음사가 노동자 지각시 분단위로 월급을 차감하거나 사내 임직원 경조사 때 부조 금액 적어내는 대장을 돌려 기입하게 한 후 해당 금액만큼을 월급에서 차감하는 등 근로기준법을 다수 위반해왔다는 뉴스를 본지 얼마 안 지나 출판업이 로맨스 매개인 영화를 본 제 탓도 있습니다. 생계, 노동, 연애를 균형잡힌 시각으로 너그럽게 바라볼 수 없었습니다. 영화속 임수정 안경테가 궁금해 모델명이 무엇인가 검색했던 것만이 유일한 적극적 행동이었어요. 60-80만원대더라고요. 아하 그렇구나 조용히 뒤로 가기 눌렀습니다. 

펜과 수첩, 이동시 읽을 책을 반드시 챙겨다니는 사람이었습니다. 짬이 안나 펼쳐볼 시간이 없어도, 짐이 무거워 어깨가 짓눌려도, 문방사우가 외출조건일 때가 있었어요. 스마트폰은 많은 걸 변화시켰습니다. 저는 종종 가방 없이 외투만 입고 장거리 외출을 나갑니다. 핸드폰과 교통카드만 있으면 시간 장소 무엇도 두렵지 않더라고요. 

그걸 딱히 인지하지 않고 살다가 아뿔싸 나는 펜과 종이를 항시 휴대하지 않는 사람이 되었구나 자각하게 된 일이 있었어요. 국회 출입명부에 이름과 방문 목적을 적어야 하는데 사람들이 줄을 나래비로 서서 책상에 붙어있는 공용볼펜 쓸 차례를 기다리더라고요. 수중에 펜 하나만 있으면 1초만에 들어갈 수 있었는데 펜이 없어 이 긴 줄 끝에 서야 하는구나 이마를 탁! 그렇다고 앞으로 펜 하나는 꼭 가방에 넣는 사람이 되어야겠다 다짐한 건 아닙니다.

새해맞이 다이어리를 사지 않은지 몇 년 됐어요. 마음에 드는 굿노트 다이어리 양식 찾는데 시간을 쏟지 않습니다. 대신 기억하고 싶은 순간을 사진으로 남겨놓고 며칠후 핸드폰 갤러리를 보며 당시 습도온도기온을 떠올려 블로그에 기록합니다. 다른 사람이 쓴 좋은 글귀를 종이에 옮겨적는 일도 더이상 하지 않아요. 사진으로 찍거나 캡쳐해놓고 활자 그대로를 타이핑 해 블로그에 옮깁니다. 아날로그 종이형 기록인간이 디지털 화면형 기록인간으로 탈바꿈한 것이죠. 

그런 저도 하루 중 반드시 펜을 잡을 때가 있는데요. 기상 후 진하게 내린 커피 마시며 그날그날 마감해야 할 일을 적는 투두리스트 작성 루틴이 바로 그 시간입니다. 하나 완료할 때마다 글자 위를 펜으로 죽죽 그어 없애는 쾌감은 어떤 디지털로도 대체가 안되더라고요. 위대하도다. 작은 성취감. 

2024년 푸른 용의 해입니다. 갑진년 맞이 푸른용 코스튬 입고 용맹한 표정 짓는 토너쥐를 멋지게 그리고 싶었는데 아쉽게도 실력이 여기까지입니다. 그래도 구독자님들이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길 바라는 제 진심만은 전달되었겠지요. 심지어 에스키스도 있는 그림이에요 저거. 

어쩐지 휘갈긴 위 버전이 더 마음에 들지만 그것이 곧 저의 한계이자 현실이라는 것을 받아들입니다. 하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