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너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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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시렵니까. 토너입니다.
연말준비 잘 하고 계세요? 불금에 정체가 없는 것처럼 연말에도 실체가 없는 거 같지만 달력에 선명하게 새겨진 11과 12를 보면 불안감과 동시, 반드시 즐거워야 한다는 의무감이 찾아옵니다. 어떻게 해야 23년 연말을 야무지게 보낼 수 있을까요. 오늘은 제가 생각하는 연말 잘 보내기 방법 3가지를 소개해보겠습니다.
첫번째,
용기내기
전 올초 10여년 넘게 연락을 주고 받은 적 없는 남자애한테 이메일을 보냈어요. 올해엔 너한테 꼭 연락을 해봐야지 생각해서 용기내본다고, 다단계나 종교권유 같은거 아니니 걱정말라는 말을 귀엽게 덧붙였어요. 답은 금방 왔습니다. 인천을 지날때면 혹은 무슨 노래를 들을 때면 가끔 내 생각을 했다는 말, 언젠가는 연락이 올거라고 여겼다는 말, 얼마전 애아빠가 되어 바쁘다는 말과 함께요. 전 걔가 결혼했을거라고는 상상도 못했어요. 스물셋넷의 우리가 그랬듯 밤새 술 마시며 세상을 욕하다 인간을 사랑하는 밤을 기대했을 뿐이죠. 와이프한테 말하고 시간 한 번 내보겠다는 말이 마지막이었습니다. 연락은 오지 않았어요. 저는 그 친구가 여전히 참 멋있구나 내가 알던 그 사람이구나 잘 살아라 마음으로 기도했습니다. 용기낸 나와, 받아준 너, 만나지 않는 게 맞다는 판단, 말하지 않아도 알겠는 마음들이 서로 통했습니다. 원하던대로 일이 진행되지 않았지만 그가 여전히 멋있는 사람이라는 걸 확인했다는 것만으로 저한텐 아주 좋은 일이었어요. 나의 용기가 헛되지 않았어요. 나도 그 사람 참 멋있네 소리 들을 수 있게 똑바로 살아야지 교훈도 됐고요.
두번째,
달리기
엄청나게 추워지는 듯 하더니 다시 날씨가 푹푹 하네요. 이런 날 저녁에 얇은 장갑 하나 끼고 가까운 공원 딱 한바퀴만 뛰어보세요. 달리는 건 진취적 행동입니다. 좀 더 나은 내가 될 수 있는 아주 쉬운 일입니다. 딱 30초만 딱 1분만 2분만 더 차오르는 숨을 견뎌봅시다. 춥지 않은 겨울밤을 색다르게 보낼 수 있어요. 연말 시상식도 4분기 작품에 가산점 주는 이마당에 11월부터 뛰기 시작해 23년 전체를 건강하게 살았다는 착각을 얻어보는 건 어떠세요. 3분 뛰고 3분 걷는 걸 4번 반복하면 젊음을 관장하는 유전자 뭐시깽이가 발견된다는 연구결과를 읽었어요. 우리 같이 천천히 나이 들어봅시다.
세번째,
낯선 곳 혼자 여행하기
11월 초 수원화성행궁에 다녀왔어요. 스스로는 가지 않을 것이 뻔하니 체험단이라는 약속으로 동력을 만든 보람이 있었습니다. 지하철로만 2시간이 걸려 도착한 곳에 제가 기대한 것과 짐작하지 못한 것, 가봐야 보이는 것들과 이미 알고 있던 것들을 마주했습니다. 그 감각들이 아주 매우 낯선 곳에서 나에게 몰아쳤어요. 해가 쨍쨍한 한낮부터 완전히 어두워진 수원 거리를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 속에 섞여 걷는다는 행위가 해외여행과 비슷한, 기분좋은 이질감을 주었습니다. 특히 수원역까지 향하는 버스 안에서 고등학생들의 걸걸한 입담을 듣는 일이 좋았어요. 인천 학생들의 거친 결과 또다른 종류였습니다. 혼자가 아니라 둘이었다면 셋이었다면 낯선 땅에서 들리는 소리에 귀를 그렇게까지 활짝 열 수 없었겠지요. 저는 수원에서 내내 귀에 아무것도 꽂지 않았습니다. 낯선 동네 낯선 소음에 나를 던져보세요. 도망친 곳에 낙원이 없다는 걸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됩니다. 어떻게든 어디서든 삶은 계속되고 현재를 사는 것이 인간의 최선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도 어쩌겠어 해야지 라는 문장이 오감을 타고 옵니다.
연말 잘 보내는 세 가지 방법을 써봤는데 어쩐지 토너 연말정산처럼 되어버렸네요. 작년과 재작년엔 새로운 사람 만나기를 두려워하지 말기가 목표였고 잘 지켰어요. 올해에는 고민하지말고 그냥하는 것이 계획이었는데 대체로 잘 지킨거 같아요. 24년 계획은 1월에 세워볼래요. 한달 남은 23년을 잘 보내주고 싶어요. 다 잡은 물고기라고 허투루 대하고 싶지 않네요.
많이 많이 웃으시고 울음이 나올 땐 참지 마시고 할까말까 고민될 땐 일단 저지르는 한달 되소서. 12월에 또 만나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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